지난 5월 23일(한국시각)은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신적 빈곤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일이 발생한 날이었습니다. 16대 전직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씨의 자살 소식이었습니다.
한 때 저 자신이 “노사모”의 일원으로 조국의 발전을 노무현씨를 통해서 기대한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세례교인 노무현씨의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배교와, 김정일을 비호하고, 북한 주민의 고통을 외면한 점에 저는 그에게서 돌아 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떠나 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진리처럼 (엡2:12), 노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죽음이 죄의 결과인 저주요, 자연현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구 자연현상의 한 조각이라고 유서에 주장하면서 마지막까지 배교의 자리에서 돌아 서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모든 죄는 용서받되, “성령을 거슬리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 분을 귀신의 두목이라고 칭한 그 당시의 종교 지도층들에게 내리신 단언입니다.
그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부분을 신학적인 측면에서, 보다 폭 넓게 설명합니다. 즉 그리스도 교회원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가장 올바르게 해석해 주십니다.
6장4-6절 말씀에 한 번 하늘의 은혜를 맛본 자의 배교행위에 대한 영적 진단이 있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한 번 맛본 사람, 즉 “세례”를 받음으로 자신을 주 예수 앞에 던졌던 사람이 변질할 경우를 설명합니다. 그런 배교자는 다시 회개하여 구원의 반열에 들어 설 수 없는 자라고 단언합니다. 그리스도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곧 “배교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득불 배교한 후에 다시금 돌이켜 용서받은 자들을 이야기 한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뻔뻔스러운, 주님보다 자신이 항상 먼저임을 끝까지 고집한 자들의 결말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그런 경우이며, 독일의 힛틀러, 이탈이라의 뭇솔리니가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이 모두가 개신교 혹은 천주교에서 세례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당연히 이 무리에 들어 갑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의 “자비”를 자신의 판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 배교자들이 죽음 직전에라도, 심지어 자살하면서도 자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괴로워할 지언 정, 이들은 한결같이 “자비”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개 중에는 되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자도 있었습니다.
삶의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자비의 여호와 대신에 죄 밖에는 남는 게 없는 자신만을 바라 봄으로써 “희망”을 포기한 불쌍한 영혼들의 모습입니다. 성령을 거슬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죄 외의 모든 것은 용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심지어 “자살자의 영혼도” 그가 진정 회개했을 때에 즉 일찍이 중생되고 세례 받았을 시에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자비를 포기한 배교자에게는 회개의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적인 결정으로, 혹은 치매와 같은 자리에서, 혹은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살한 신자들이라도, 그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이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고 세례 받은 자들은 전혀 심판의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부터 영원토록 누리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나 “공덕’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살 순간에 회개치 않았다고 영멸의 길로 신자들이 들어서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회개하고 구원받아 세례 받음으로 모든 게 영원히 해결난,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분의 영원히 변치 않는 자비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용서 받은 죄 중에는 “자살”도 포함됩니다. 성령을 거슬리는 자와, 돌이키지 않은 배교자들 외에는 모두가 영원히 용서 받은 자들이기에 우리는 참으로 복있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