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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023. 마태복음 성경공부. 21.1-11.49회
마태복음 성경공부 – 제49회.
4부. 16:13-23:39. 세상을 떠나시는 날이 다가 옴
16. 예수님께서 메시야–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21:1-11)
1) 마침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자신을 따르던 사도들과 나머지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출발하셔서 감람산 서쪽 산허리에 있는 곳에 도착하셨다. 여리고에서부터 따르던 무리도 함께 했다. 거기에 벳배게라는 (종려나무의 집) 종교적 마을이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비록 예루살렘의 성밖에 있지만 행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성의 일부로 인정된 도시이다. 기드론 시내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마주 보는 곳이기도 하다.
2)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서, 벳배게도시로 들어 가서, 줄에 묶여 있던 나귀와 그 어린 나귀를 풀어 데려 오라고 하셨다. 그 나귀들의 소유주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사를 그 소유주와 미리 이야기하신 것인지도 또한 우리는 아예 모른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충실히 성취하심으로써 자신의 메시야 – 왕이 되심을 이제야 당당히 드러 내려 하심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겉옷들을 벗어 두 나귀들 위에 안장으로 걸쳤다 (스가랴 9:9).
3)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고난과 죽음 당하심과 부활하실 것임을 이미 밝히셨다 (마태복음 16:21). 그렇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들을 가져왔고, 그 위에 자신들의 겉옷들을 안장으로 만들어 랍비되신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으러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무리와 함께 입성하시도록 말씀에 따라 특별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귀 위에 앉으신 것을 본 무리들은 세 가지의 반응들을 보였다: (1)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시는 길 위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들을 펼쳐 놓았다; (2)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들을 꺾어 그 길 위에 깔아 놓았다; (3) 예수님의 앞 뒤로 무리들이 동행하면서 큰 소리를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 자손이시여!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복되시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라고 외쳤다 (참조; 시편 118:26).
4)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스가랴 선지가 예언했던 메시야 – 왕의 특징을 그대로 성실하게 드러내시려 하셨다. 메시야 – 왕께서는 공의로우시며, 겸손 (혹은 온유) 하시고, 평화를 추구하시고 이루신다고 스가랴는 예언했었다 (스가랴 9:9-10). 하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에서 오신 선지자이시라는 정도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21:11). 유월절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이렇게 입성하심으로써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평화의 통치를 하실 것임을 당당히 선포하셨고, 시온의 딸들에게 왕으로 찾아 오셨음을 또한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통치의 방법이, 자원하시어 스스로를 다가 올 죽음에 던지시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려 하시기로” 결심하시고 공개적으로 실행하시는 시작이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0:28). 따라서 이러한 특이한 형태의 입성으로 예수님께서는 왕과 메시야로서 존귀하심과 엄위하심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보잘 것이 없는 어린 나귀위에 앉아 계심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낮추심을 실행하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입성하실 때, 따르던 무리들과 제자들이 열광적으로 메시야 – 왕을 환영하듯 옹위한 것에 대해 조금도 부정적이나 소극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메시야 – 왕이 되심을 당당히 드러 내신 것이다. 당연히, “다윗의 (아들) 후손”이라는 명칭이 메시야의 존재에게만 해당되며 (마태복음 9:27; 12:23; 15:22; 20:30), 분위기에서 볼 때, “호산나!”를 외친 것은 왕을 영접하는 환호와도 같은 공적 인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는 따르던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축제 분위기로 입성하신 것을, 메시야께서 자신들을 방문하신 것처럼 변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겠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참조;시편 148:1)를 무리가 외쳐, 하늘의 천군천사들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려 방문하신 메시야께 찬양을 드릴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무리들의 이러한 환호를 이제 우리가 쉬이 이해할 수 있다.
6) 반면에 예루살렘 거민들은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기에, 이러한 환영인파와 그들의 환호에 어리둥절하였다. 여리고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가 거민들에게 전해 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오신 선지자”라고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마태복음 21:11). 전해 준 무리들 조차도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대해 일반적으로 이정도까지를 확실히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시야말로 자신들의 메시야 – 왕이 되심이 정확하게 받아 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거민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실 메시야 – 왕이시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갈릴리 출신 나사렛 예수님을 위대한 메시야 – 왕은 커녕 선지자로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유대인 중심의 신정국가를 세우실 분이라는 사실을 예루살렘 거민들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할 점: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메시야가 되시며, 왕이 되심을 초지일관되게 드러 낼 방법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