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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023. 마태복음 성경공부. 18.21-25. 제43회
마태복음 성경공부 – 제43회.
4부. 16:13-23:39. 예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투쟁
9.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한 건덕과 치리 (18:21-35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계속 가르치신다. 특히 누군가가 동료 제자에게 (무례하게)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 것을 가르치신다.
1) 베드로가 교회 안에서 한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당한 형제가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야만 하는가를 예수님께 물었다. 베드로는 무례하게 행동한 형제(제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빌 때에야 만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조 누가복음 17:3-4).
2)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냐고 베드로가 물었을 때,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제자들 사이에 죄를 지은 제자를 그 일을 당한 제자가 어떠한 원리에 따라 대해야 할 것을 밝혀 주신 것이다.
3)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왜 용서하는 일을 결단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밝혀 주신다.
(1) 하나님 나라에서는 용서하는 행위가 일상적인 삶의 일부이므로, 이 땅에 살면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제자들은 이 원리에 따라 살아가야만 한다.
(2) 왕이 자신의 청지기들 중의 한 사람을 불러 자신과 회계를 하게 한다. 그 청지기는 왕에게 일만 탤런트를 빚지고 있다 (한 탤런트는 노동자가 이십 년 동안 일하여 받을 임금에 해당한다). 즉 그 청지기는 왕에게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는 금액의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3) 따라서 왕은 그 청지기와 그의 아내 그리고 자녀들까지 모두 노예들로 팔고 그의 모든 재산도 처분하여 빚을 갚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도 청지기가 왕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는 것이 결단코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4) 청지기가 왕에게 꿇어 엎드려 간구하기를,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자신이 모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인내해 주십사고 간청한다. 이에 왕이 놀랍게도 그 청을 들어 주어 그의 모든 빚을 갚아 준다. 이는 순전히 왕의 자비하심에만 따른 빚 탕감, 즉 죄 용서일 뿐이다.
(5) 그 청지기가 왕에게 빚의 탕감을 받고 나와서 곧바로 자신에게 빚을 진 동료 청지기를 만나자 마자, 그의 멱살부터 잡고는, 화를 내면서 요구하기를 자기에게 “진 빚을 모두 갚으라”고 명령한다. 그 빚의 총액은 일백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우스는 노동자의 하루 일당 임금이다).
(6) 동료 청지기는 자신의 빚을 당장 갚을 수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가 진 빚의 총액을 자신에게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는 동료가 왕에게로 부터 탕감을 받은 빚의 총액과 비교할 때, 빚의 금액은 거의 아무 것도 아닐 정도의 적은 금액이다. 그렇지만 빚을 진 동료는 엎으려 자신의 동료에게 다 갚을 때까지 인내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그의 간청하는 말들이 자신의 동료가 얼마전에 왕에게 간청하였던 말들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빚을 탕감 받았던 청지기는 자신에게 빚을 진 동료를 감옥에 넣으며, 거기서 노동하고 받을 임금으로 자신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강제 노동하게끔 조치한다.
(7)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 진 것을 목격한 나머지 청지기들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하신다. 그들이 “화가 났다”가 아니라, “마음에 괴로워 힘들어 했다.” 왕이 자비를 베풀어 주었더니, 그 자비를 “불명예스런 수치”로 만들어 버린 일에 대해 동료 청지기들이 “마음에 괴로워 힘들어 했다”고 표현하신 것이다. 왕이 자신에게 빚을 진 청지기를 감옥에 영원히 가두어 두었더라면,그 청지기가 이렇게도 무자비하고 사악한 죄를 짖는 행동을 가난한 동료 청지기에게 저지르지 않았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사악하고 무자비한 청지기는 결국 왕에게 불명예를 가져다 주고, 자신의 무자비한 죄에 왕이 직접 원인제공을 한 결과를 도출했고 자신의 죄에 왕이 공범이 되게 끔 만들어 버린 것이다.
(8) 결국 왕은 더 이상 이 사악한 청지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결정한다. 다시금 이 사악한 청지기를 부르고 그에게 왕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그는 물론이요,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노예들로 팔려가게 조치한다. 왕은 그 청지기가 무자비 하게 정의를 근거로 동료에게 행했던 그 무자비를 그와 동일한 “정의”를 근거로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청지기 자신은 감옥에서 강제노동으로 버는 임금으로 왕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강제노역을 하며 감옥생활을 영원히 하게 된다.
(9)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점을 확실히 가르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즉 이 세상에서 교회에서는, 어느 제자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형제를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그분께 누를 끼치는 불명예로 만들어 버릴 때, 그 무자비한 제자는 결국 영원한 벌과 고문과 파멸을 영육에 모두 받게 된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형제의 죄를 그에게 용서한다는 것과 겉으로 명령에 따른 의무감에 따라 그를 용서한다는 행동만을 취하는 것이 아예 대조가 된다는 사실이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명령에 제자들이 다른 그 어떠한 조건을 달아서는 되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밝히신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용서하는 행동, 즉 많이 여러 번 용서한다는 숫자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밝히신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자신이 형제를 용서할 때에 자신의 용서하는 행동과 마음의 자세를 자신이 하나님께 이미 지었고 지금도 짖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을 모든 죄들을 하나님께서 무조건 모두 용서하신 사실과 비교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신 사랑은 능력이 있어 용서받은 제자의 삶의 전반을 변화시키기에, 그의 삶에서 용서받은 자비가 죄지은 형제를 향하여 드러나지 않을 시, 그는 아예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의 죄를 전혀 용서받지 않은 제자일 뿐이다.
생각할 점:
교회 안에서 우리의 영적 생활 중에 우리에게 무례히 죄 지은 형제나 자매에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죄 용서받은 그 능력을 드러내고 살고 있는가 (참으로 두려운 문제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