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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공부 – 7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11-32 (세 번째 이야기)
- 이야기에 대한 상세한 이해
예수님께서 하신 세 가지 이야기 중에 마지막 것은 이 비유의 정점을 찍는다. 마지막 이야기에 담긴 아주 유의미한 몇 개의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1) 아시아에서나 북아프리카에서나 중근동의 어느 부락에서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반응을 고려해 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이야기는 아직 건강하고 다른 문제 또한 전혀 없이 자신의 재산을 무난히 꾸려 나가는 아버지와 장성한 두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그 부락의 사람 모두가 관습적으로나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도, 또 전혀 받아 들이기 어려운, 가족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특이한 반응들이었다.
2) 성경에서 본다면, 아버지가 두 가지 방법중의 하나로 유언을 만들어 자신의 재산을 아들들에게 상속한다. 대개의 경우, “말로 전하는 유언”을 곧 닥칠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자신이 원하여 만든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통보받은 히스기야왕의 예는 “말로 하는 유언”이며 자신의 병으로 죽게 되기 전에 만든 것이다 (열왕기하 20:1; 참조, 창세기 49:28-31; 열왕기상 2:1-9). 나머지 경우는 “문서로 유언”을 작성하는 것이지만, 신구약 성경에서 찾기 아주 드물다. 따라서 “말로 전하는 유언”이 보편적으로 구약시대에 행해지던 관습이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을 때, 누구의 외압도 없이 자발적으로 아들들에게 “선물”을 미리 나눠주는 예가 드물지만 있기는 하다. 아브라함이 자신과 자신의 아들 이삭에게 야훼께서 말씀하신 언약을 염두에 두고, 이삭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후처인 케투라의 아들들에게 미리 선물을 주어, 자신과 이삭의 장막을 떠나 멀리 가서 살도록 그들을 보냈다 (창세기 25:6). 그 다음절에 아브라함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직 정정할 때, 자신의 재산을 상속자들에게 미리 나눠주려고 유언을 만드는 관습은 그 당시에나 오늘날에도 아예 없다. 되려 바벨론 미쉬나는 기록하길, 자신이 정정할 때 자신의 재산을 미리 유언으로 나누어 주는 유대인 아버지의 경우, 그러한 아버지를 아주 수치스러운 사람이라고 밝힌다.
3) 그런데 아직 정정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자원하여 나누어 주는 경우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생긴다 할지라도, 막상 그 상속인들은 그 받은 재산을 처분할 권리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전혀 사용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아직 건강할 때, 설령 유언을 작성하여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그가 직접 공급하는 물품으로 계속 생활해 가야만 한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그러한 관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즉 상속을 약속받은 아들들이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 자신의 상속받은 재산을 처분할 수 없기에,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로부터 직접 공급받는 것으로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직 자신의 아버지가 건강하게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상속자들 중에 그 누구도 그 상속된 재산권을 파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그들 사이에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일반관습이다.
4) 구약시대나 오늘날에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아버지가 건강하게 생존해 있을 때, 그 어느 아들도 감히 자신의 몫을 상속으로 미리 달라고 아버지께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작은 아들이 그러한 요구를 감히 하였을 경우, 우린 두 가지 사실을 작은 아들에 관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 이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기를 간절히 원했다; 나) 이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아직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아예 죽은 양 그분을 취급하고는, 자신의 상속받은 재산을 즉시로 처분할 권리를 달라고 아버지께 요구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팔레스틴지역에서는 이런 경우가 아예 전혀 없었을 것이기에 이를 듣거나 목격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예가 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작은 아들은 그야말로 파렴치하고 부도덕적이며, 아예 아들이 되기를 포기한 경우에 해당된다 할 정도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직 정정하게 살아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5)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자는 당연히 자신의 동생을 심하게 나무라고, 그의 잘못을 지적한 후에, 고치라고 충고할 자리에 있고, 그러할 역할을 당연히 해야만 했다. 따라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반드시 사과를 드리고 격분한 아버지께 작은 아들이 행동을 돌이켜서 화목하게 지내도록 그 관계를 바로잡아야 하는 역할을 장자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장자는 자신의 동생이 아버지께 재산권 상속을 요구할 때부터 자신과 동생 모두가 건강하신 아버지로부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했던 재산의 상속을 실제로 받았고, 동생이 정작 상속받은 재산을 즉시로 모두 처분할 권리마저 허락을 받았으며, 그 재산을 즉시 정리하고 떠날 때까지도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장자가 자신의 동생의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그 잘못을 지적하지도, 그로 하여금 고치도록 강권하지도, 더군다나 장자 자신마저도 아버지께서 미리 나눠주시는 재산상속권을 극렬하게 반대하지 않고 모두 받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아주 충격적인 그의 반응이라 하겠다. 따라서 장자 마저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온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야기의 맨 뒷부분에서 보듯이 장자는 자신의 동생이 상속받은 재산권을 즉시로 처분했으며, 멀리 떠나 그곳의 친구들에게 그 돈으로 잔치를 베풀고 모두 탕진해 버렸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알린다. 그리 하면서 장자 자신도 동생처럼 처음부터 그리하고 싶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아버지께 결국에는 불만을 크게 표시하면서 밝혔던 것이다.
6) 아버지의 반응이 상식적으로 어떠 해야할지를 보겠다. 당연히 작은 아들에게 화를 내고 그의 몰염치한 요구를 반드시 거절함과 동시에 그를 응징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비유속의 이야기를 듣는 팔레스틴 청중들의 태도가 그리할 것이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상상하기 조차 힘든 파렴치한 요구를 했을 때, 아버지가 취한 행동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상상마저도 아예 넘어가는 처사이었다. 점입가경의 경우라 하겠다. 아버지는 자신이 곧바로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작은 아들의 요구대로, 즉시로 두 아들에게 각각의 재산상속의 몫을 나눠 주었고, 자신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죽은 것인 것처럼 자신을 취급하는 작은 아들에게 즉시로 자신의 상속받은 재산을 처분할 권한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파렴치한 작은 아들의 요구를 당연히 거절하지도 그를 되려 크게 응징하지도 또한 그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놀랍게도 아예 없음을 예수님께서 이야기 속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 아버지는 동생과 같이 아버지께서 나눠 준 재산상속을 말없이 모두 받은, 장자의 자격조차도 아예 없는 그에게 자신의 몫으로 재산권을 상속해 받고 즉시로 처리할 권한도 미리 허락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뻔뻔한 그에게 화를 전혀 내지도 않았으며 그의 역할을 제대로 하라고 강권하며 촉구하는 것 조차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