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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작은 아들은 자기 고향과 조국을 떠났을 때, 조금도 고향이나 나라에 대한 미련없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났다. 그 때까지 여전히 살아 계시던 아버지나, 형이나, 동네 사람들과는 자신이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관계라는 생각으로 멀리 이방인의 나라로 떠났다. 이방인의 나라에서 모세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이방인친구들을 사귀었다. 자신이 가진 흥청망청 마음껏 쓸 재산이 풍부하였기에 이방인친구들을 사귀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매일 잔치를 베풀었고, 연회에 참석하는 이방인 친구들과의 기쁜 교제로 크게 만족스런 삶을 누렸다.
8) 결국에는, 작은 아들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탕진하였으며, 극심한 가난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 중 그 누구도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가진 재산이 사라지자, 모든 친구들도 사라졌고,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사람조차 아예 없었다. 이방인 돼지농장주가 그를 고용하여, 돼지를 관리하라고 들판으로 보냈다. 부정한 동물 중의 하나인 돼지를 치는 일을 모세의 율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먹고 살아 보려고 돼지농장에서 했으나, 돼지가 먹는 사료조차 없어서 자기 몫으로는 없게 되자 돼지 보다도 못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에야 비로서, 고향에 있는 아버지집에서 배부르게 먹는 고용인들과 굶주린 자신을 비교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육체적인 배고픔과 함께 자신이 고향에서부터 가졌던 영적 공황이 그에게 찾아 왔으나,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생각만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다.
9)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때에 정신을 차리고”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5:17). 육체적인 배고픔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었던 지금까지의 행적과 현재의 처지를 자각하게 하였다. 무조건 이방인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탕자는 어리석게도 그들과 교제를 친밀히 하면서 자신의 가진 재물을 연회 등에 모두 탕진하였다. 자신이 이제 굶어 죽을 처지에 다다라서야, 고향에서 자비로우신 아버지 덕택에 풍족하게 호사를 누렸던 생활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용하여 쓰는 일꾼들이 자신의 현재에 처한 형편보다 훨씬 풍족하게 먹고 살고 있으리라는 사실이 그의 현재 처지와 더 뚜렷하게 비교되었다 (누가복음 15:17). 바로 그때에야, 탕자는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가기를 결심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돌아 옴을 분명히 반겨 주시리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떄문이다.
10) 하지만, 아버지의 집에는 그의 형이 아직도 살고 있었다. 많은 노예들도, 고용일꾼들도 그 집에 남아 있었으며, 자신의 과거행적을 익히 아는 동네 사람들도 그 동네에 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타국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가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작은 아들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모두 잘 아는 사람들이 있는 동네에 가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 가서 살면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맞게될 위기를 극복하려, 탕자는 아버지께 가서 드릴 고백의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께 자신을 아버지께서 고용할 일꾼들 중의 하나로 써 주시길 부탁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 될 경우, 자신은 아버지 집과는 상관없이 따로 자신만의 거처를 가지면서 출퇴근하며, 아버지를 위해 일하고, 임금을 받아, 독립적인 생활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여,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나이다. 그러하오니, 저를 당신께서 고용하는 독립된 일꾼들 중의 하나로 써 주시옵소서” (누가복음 15:18). 이처럼 탕자는 자신이 할 고백을 미리 연습해 보았다.
11) 마침내 작은 아들이 고향의 동네 어귀 가까이 다다랐을 때, 남루한 옷을 입은 그를 아무도 몰라 보았지만,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의 눈에 그가 띄었다. 탕자를 알아 본 아버지는 그를 보는 즉시, 마음에 “자신의 아들을 향해 자비심이 솟아났다” (누가복음 15:20). 즉시로 아버지가 취한 행동은 모든 동네 사람들도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는 남자 어른이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대로에서 뛰어간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할 수치스런 행위로 여겼다. 하지만, 탕자의 아버지가 대낮에 바로 그 수치스런 행위로 스스로의 가진 모든 명예도 체면도 내 던지며, 동네 어귀 밖에 있는 자신의 작은 아들을 향해 달려 갔던 것이다. 자신의 노예나, 고용한 일꾼들을 포함해서 모든 동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가 명예도 체통도 던져 버린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12) 동네입구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명예도 체면도 내 던지며 자신의 기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유대인의 그 어느 동네에서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아버지가 취할 행동이 아니었다. 되려 탕자를 아버지가 아예 무시하며, 자신의 집에서 내치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정상적인 아버지가 가질 반응이었던 것이다.
1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야기 중에서 아버지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아들을 무조건 용서하며, 그를 크나큰 사랑으로 품어주는 모습에 탕자가 나타낸 아주 특이한 반응 또한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나이다. 그러하오니, 저를 당신께서 고용하는 독립된 일꾼들 중의 하나로 써 주시옵소서” (누가복음 15:18)라고 타국에서 이미 연습하였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환대에서 탕자의 마음이 완전히 겸손하게 되었으며 용감하게 되었고 확실하게 바뀌어졌다. 그래서, “아버지여,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나이다” (누가복음15:21)라고 고백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체면을 위해 계획했던 뒷부분의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하오니, 저를 당신께서 고용하는 독립된 일꾼들 중의 하나로 써 주시옵소서” (누가복음 15:19)라고 미리 연습한 고백의 대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할까?
14) 예수님 당시에, 부잣집에서는 노예들 외에도 두 종류의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첫 번째로는 부잣집에 기거하면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요, 두 번째로는, 독립적인 거처를 가지면서 출퇴근하며 일하고, 임금을 받는 일꾼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이 두 부류의 일꾼들 사이에 서로 차별이 전혀 없었고, 대우도 동일하였다. 탕자는 애초에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버지께 자신이 독립적으로 사는 고용일꾼으로 써 주시길 부탁하려 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살아가다 보면 임금을 모아 결국에는 자신이 이미 탕진한 아버지의 재산도 되 갚아 드리고, 자신의 형에게도, 일꾼들이나, 노예들에게도, 심지어 동네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자신의 체면을 손상 당하지 않고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다고 자신있게 계획했던 것이다.
15) 작은 아들이 갑작스럽게 마음을 완전히 바꾼 이유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체면도 명예도 내 던지면서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로 자신을 품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탕자 또한 이제는 자신만의 위신도, 자존심도, 체면도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면서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만으로 아버지의 집에서 이전처럼 살 수 있다는 겸손과 지혜와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16)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탕자가 아버지의 엄청난 환대에 반응하여 겸손히 말한 고백에 대꾸 조차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자신의 집으로 아들을 데리고 와서, 즉시로 자신의 노예들에게 명령하셨다. “빨리 제일 좋은 겉옷을 가져와서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그의 발에 신발을 신기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다 죽여서 마음껏 먹고 잔치를 하자. 왜냐하면 나의 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며, 내가 그를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았기 때문이니라” (누가복음 15:22-24). 돌아온 작은 아들이 동네 입구에서 아버지에게 겸손히 고백을 하자마자, 아버지가 취한 행동은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라 하겠다. 아버지가 아들을 야단 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귀중한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아들이기에, 이제는 자신과 전혀 무관한 타인처럼 취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즉시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어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도 못하게 막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예들에게 즉시로 아들의 체통을 제대로 갖추게끔 도우라고 명령을 하였고, 잔치를 가질 준비를 하게 하였으며, 그 이유를 당당히 선포하였다. 자신의 아들을 향해 단 한 마디의 부정적인 말도 태도도 취하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되려, “빨리 제일 좋은 겉옷을 가져와서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그의 발에 신발을 신기우라”고 명령하셨으니, 그 집안에서 그 누가 감히 탕자에 대해 부정적인 말이나, 태도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