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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022. 누가복음 비유성경공부. 누가복음 16.19-30. 21회3부
누가복음 공부 – 21.3부 (누가복음 16:19-30)
누가복음 16:19-30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2. 신학적이며 실천적인 결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은총에도 고통에도 반응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왜”라기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할까를 물어야 한다.
1)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과 삶이 주는 고통에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이 비유에서 깨닫게 된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자신만을 위해서 썼으며, 가난한 이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무관심했고, 교만했으며, 자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는 귀족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나사로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을 참고 오래 견디며, 선한 마음을 계속 유지했고, 자신의 병과 굶주림에 무관심했던 부자를 용서하면서 삶을 이어갔다.
2) 나사로가 살면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대처하는 것을 보며, 또 죽고 나서도 부자를 용서하고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도우셨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됐다.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있었기에 나사로가 자신의 삶에 그렇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사람”이라는 뜻이 “나사로” (아람–히브리어, 엘’ 아자르)라는 이름의 뜻이며 그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삶을 살았다.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을 받아들이지 아니 했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잘 이끌어 나가고 영위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기에 그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옥에서 부자는 나사로 (엘’ 아자르)가 되고자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사람) 그렇게나 간청하고 원했지만, 이미 그 시기를 놓쳤던 것이다.
3) 지옥에서는 “회개가 불가능하고, 단지 후회만이” 있을 뿐이다 (고린도후서 7:10).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때요, 우리 구원의 날이다” (고린도후서 6:1-2).
4) 조상 아브라함을 자신의 혈족으로,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부자는 그에게 호소하였다. 지옥에서 부자가 아브라함과의 혈족관계를 중시하였지만, 그러한 혈족관계가 그가 살아 있었을 때 그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드는 것에 전혀 도움을 주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이방인들을 깔보며, 그들보다 자신의 종족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을 도우셔서 자신은 안전하리라고 믿어 “거짓안전”이라는 유혹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민족이 타 인종들과 다르게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종차별을 두지 않으신다 (누가복음 3:8; 에베소서 2:14).
5)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의 가진 특권이요 의무가 되는 이웃사랑을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힘껏 행사해야만 한다. 그 지역사회에서 나사로는 이웃사람(들)과 부자의 집을 지키는 개들과, 그리고 죽은 후에는 천사들과 아브라함에게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
6) 물질적인 부가 그 자체로는 많든 적든 죄가 아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자신의 풍족한 물질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재물을 잠시 맡고 있는 청지기들에 지나지 않는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 사용했다. 그 부요한 재산을 자기 마음껏 원하는 대로 언제든 사용할 수 있을 때, 참 소유주 되시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자신의 집에서 부리는 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지역사회의 곤궁한 이웃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살았다.
7) 지옥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부자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재물의 신, 맘몬”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 대신에 “맘몬”을 자신의 신이요 주인으로 삼았던 것이다. 자신이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이 정중히 영접한 초대손님 나사로를 부자는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비천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 살았을 때 가졌던 자신의 고정관념을–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부자는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8) 우리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 분명히 또 다른 삶이 있다. 죽음이 우리의 삶의 끝은 결단코 아니다. 우리가 현재 영위하는 삶은 죽음 후의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9) 사는 동안에 우리가 겪는 고통에 무슨 뜻이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왜 병에 걸렸고 아파하며, 어떻게 그리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사로는 자신이 병들어 힘이 없고, 종기가 헐고 굶주리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리스를 닮은 성품으로 부요한 재물을 가지고서도 자신을 포함한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삶에만 푹 빠져 만족하며 사는 부자를 향해 조용히 인내하며, 그를 용서하며 매일 자신의 어려운 삶을 견디며 살아 가고 있었다. 의인 욥보다도 이 점에서 나사로가 더욱 인내하며 자신의 남은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욥은 고통을 겪은 후에 자신의 남은 삶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나사로는 인내하며 살면서도 어떠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그 아픔과 정신적으로도 무시당함과 굶주림 속에서 죽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로는 살아있을 때 이웃사람(들)과 부잣집의 개들이 그를 도와주고 사랑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는 자신이 살았을 때 겪었던 일들에 대해 보상으로, 천사들과 아브라함이 그를 도와주고 위로하고 영접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나사로는 자신을 도우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 즉 자신의 아프고 고통받는 삶을 도구로 하여 물질이 풍부한 부자에게 궁핍하고 고통받는 자신을 포함한 이웃들을 도움으로써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들을 매일 제공하는 인내하는 삶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의 일생을 이끌어 가실 때, 고통을 그들에게 허락하시면서 분명히 그 고통에 따른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다는 정도까지 만을 우리가 인지할 뿐이다.
10) 자신의 말씀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도록 부르신다. 기적들이나 환상들과 같은 말씀 외의 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하라고 부르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말씀만으로 회개하라고 죄인에게 명하신다.
11) 사람이 다시 살아 났다는 것을 간접으로 체험하거나, 그러한 사실들을 알았다고 해서 그 죄인이 회개하게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러한 현상들이나 지식으로 인해 당연히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죄인이 가지게 되지도 않는다.
12)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살았던 부자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해 오래 참으셨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브리서 9:27; 10:2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