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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공부 – 13-2부 (누가복음 10:25-37)
누가복음 10:25-37 (자비가 넘치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
1.일반적이고 문화적인 배경 이해
7) 예수님의 비유에서 등장인물들을 좀 더 살펴보자. 거의 죽어가는 강도를 만난 사람 외에도 첫째로 강도들이 있다. 범죄를 저지르는 장소에 강도들이 “왔고”, 사람을 “해쳤고”, “떠났다.” 물론 예수님도 청중들도 자연스럽게 강도들과 생명이 위중한 사람 모두 유대인들이라고 전제한다. 따라서 강도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유대인의 몸을 더럽힌 결례법에 따라 정결케 되는 규례를 행해야 하는 것임을 무시하고 저지른 죄이다.
8)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약 17마일되는 광야길로 이어지는 가운데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길은 예로부터 여행객들이 도둑들과 강도를 자주 만나는 위험한 길이다. 심지어 19세기까지도 이러한 일들이 여행객들에게 자주 일어 났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군대가 강도들을 모두 없이 하려 했을 정도였으나,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그들이 근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광야길에 여행객들은 주로 낙타나 나귀들을 사용하여 움직였다. 조금 구비진 길이지만 멀리서도 여행객들은 서로를 인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9) 둘째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제사장이 비유에 등장한다.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제사장들 이야말로 최상위층의 부유한 계급에 있는 무리들이다. 이 제사장도 반열에 따라 두 주간 동안 성전에서 행하는 제사에 따른 의무와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이었다. 제사장들이 만약에 죽은 사람과 접촉했거나 그와 가까이 있었다면 결례법에 따라 정결케 되는 율례에 따라 예식을 일주일간 시행해야 하며, 당연히 모든 제반 제사직무수행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직무수행에 대한 모든 보상으로 받는 거제예물들을 가져가지 못하게 된다 (민수기 19:8-32). 그리 될 경우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집에 종속된 일꾼들 에게까지 경제적 손실을 가져 오게 된다. 따라서 자신들의 정결을 유지하려 제사장들은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는 들어 가지 않으며, 약 4피트 정도의 거리를 사체와 유지해야만 한다 (민수기 19장 ; 에스겔 44:25-26). 그들은 제사직무 수행전과 수행기간에는 포도주와 독주 조차도 마시지 못하게 되어있다 (레위기 10:9; 에스겔 44:21).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제사장도 당연히 생사불명한 상태로 길 위에 누워있는 여행객을 “내려 오다가” 멀리서 “보았고” 그 사람을 피해서 “둘러서 떠났다.”
10) 셋째로, 레위사람이 등장한다. 이 무리들도 유대사회에서 제사장무리 바로 아래의 계급에 위치하며 성전에서 수행하는 제사장들은 보조하면서 생활하기에 상당한 지위와 물질적 부유를 누렸다.그들은 제사장만큼 철저하게는 아니지만 자신들의 정결을 유지하려 많이 노력하며 제사장들의 모본을 철저히 따르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 레위사람도 당연히 길을 “내려 오다”가 죽어 가는 여행객을 멀리서 인지한 후에, 조금 가까이 “가서 보고”는 역시 그를 피하여 “돌아서 떠나갔다.” 레위사람은 자기 앞에 지나 내려 간 제사장이 있었음을 멀리서 이미 인지하였기에 자신의 정결을 더럽히는 상황을 만나게 되니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제사장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하였던 것이다. 그는 죽어 가는 여행객을 가까이 가서 보기까지는 했지만 자신을 정결케 하고자 그를 만지지도, 그에게 응급처방을 할 방편조차도 행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11)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이든, 레위인이든, 심지어 일반 유대인의 대표든, 성전에서 제반 제사의식에 참여하려면, 자신의 정결을 먼저 유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성전의 동쪽 문 앞에 모여서 정결케 되는 예식을 거쳐야 하는 데 꼬박 한 주간이 걸린다. 그 후에야 만 성전 뜰로 들어 갈 수가 있다. 특히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사체를 가까이 하여 자신을 더럽혔을 경우, 결례법에 따라 자신을 정결케 하는 예식을 반드시 거행해야만 했다. 그는 먼저 희생제물에 합당한 송아지를 찾고, 사서, 불에 완전히 태워 재로 만들고 그 재를 성문 밖에 나가서 흘려 보내는 등의 까다롭고도, 존경받고 있는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예식에 직접 참예하기에,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요, 결국 성전을 방문 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도 힘든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12) 비유를 듣고 있던 율법사나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그 다음 장면에 네번째로 등장시킬 사람으로 일반 유대인을 언급하시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을 언급하셨다. 현재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여쭈어 본,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으로써 이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중이다. 율법사는 나의 이웃을 알면 그에게 선을 행하여 영생을 상속으로 얻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미워하고 멸시하였다. 심지어는 이방인들보다 더 못한 부류의 사람들로 츼급하였다. 예를 들어 유대인의 정경 뒤에 수록된 책 중에 “벤시랔의 아들”50:25-26에 기록된 부분을 보자:
“25두 민족들을 내 영혼이 혐오하며, 세번째는 아예 민족 축에도 들지 못한다:
26 세일산의 거주민들과 블레셋 사람들이요, 마지막으로 세킴에 거주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13)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여느 유대인들 보다는 조금 낫고 자유로운 경우에 처해 있다. 일반 유대인들은 더렵혀 진 자신을 의무적으로 정결케 되는 예식을 행해야 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시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멀리서 위중해 보이는 사람을 보았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은 세 가지의 행동을 할 수 있다: 가) 어떤 유대인이 강도들을 만나 목숨이 위기에 처했다고 단정하고, 그 의식불명의 유대인을 관례대로 무조건 무시하고 피해 내려간다; 나) 다른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도록 간단히 응급처방을 속히 그 사람에게 해 주고 떠나 간다; 다) 그에게 응급처방을 베풀고 나서 나귀에 태워 여리고로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도록 해 준다. 이럴 경우에는 여리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칫하면 자신이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는 것 조차도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일인데, 심지어 신체적 접촉을 자신도 모르게 사마리아인에게서 당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고, 결단코 자신에게 일어 나서는 안 될 수치스럽고도 모욕적인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마지막 경우의 행위를 취하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로 “가까이 와서 보고”, “응급처방을 할 만한 재료들을 “꺼내고 직접 처방한 ” 후에, “나귀에 태우고”, 죽을 각오를 하고 여리고로 “가서” 여관에 환자를 맡기고,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여관 주인에게(유대인) 두 데나리온 (약 300-400불 정도)을 따로 더 주며 그를 계속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 오는 길에 다시 들러 경비를 더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여리고의 유대인들 중에 분명히 이러한 일이 밤새 유대인 여관주인등을 통해 알려 져 자신의 처지가 위험해 질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하룻밤을 머물렀고, 심지어 나중에 다시 방문하겠다 하여 자신의 생명을 건 위험천만한 행동을 그 유대인을 위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