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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공부 – 3
1) 누가기자가 쓴 두 번째 책 내용중에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의 복음선포가 의미없게 된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부활직후에 예수님께서 집중적으로 하신 말씀에 귀기울여 보자. 예수님의 일생이, 즉 말씀과 이적들이 모두 부활을 통하여, 참 진리임이 입증된 것 또한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부활 후, 예수님의 은혜와 배려로, 40일 동안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자주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고, 앞날의 복음선포를 위한 경험을 가진 증인들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가진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사도들의 제일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언제 완성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답변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아버지의 영역이니, 제자들이 “언제”와 “이스라엘”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하나님 나라” 자체에 관계된 일들에만 관심을 갖도록 그것들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2)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사람의 죽어 어두워진 영혼을 중생시키시는 순간에 “하나님 나라”는 그 사람에게 이미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만 국한된 육체적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영적 삶으로 관심을 바꾸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매일 묵상하도록 하심이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베푸신 제자들과 동행하신 삶의 진수이다. 예수님과 동행한 그 무리가 보여 준 삶의 모습이, 이 세상에 드러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도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들이, 곳곳에서 모일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유일하게 이 세상에 지금까지 보여 주고 있다.
3) 우리가 과연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살면서 완전히 볼 수 있을까?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게 되는 영원한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도바울은 세 번째 하늘, 즉 낙원에 가서 들은 말들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감히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도, 또한 해서도 안 됨을 밝혔다 (고린후서 12:4). 아담이 죄짓기 전에 살던 에덴동산 (낙원)이 아담부부를 야훼께서 추방하신 이 후로 결국 노아홍수후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생명나무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에서 다시 낙원을 허락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중생한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알고 그 안에서 살아 갈 뚜렷한 길이 현재로는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사는 제자들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완전히 이해하기도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소망하며 살게 할까에 대해 예수님께서 베푸신 방편이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4)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가 바로 그 방편이다. 구약세대에도 가끔 “비유”가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는 방편으로 쓰이긴 했다 (사무엘하 12:1-4). 예수님의 가르치신 비유를 통하여, 논리와 뚜렷한 이성의 추론과 거기서 도출된 결론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나라요, 죄로 인해 받은 모든 타락과 죄책마저도 사라진 나라요, 온 우주에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만이 자녀들의 즐겁고도 완전한 순종을 받으시며, 완전한 의로움만이 가득한 나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역당시에 이사야선지가 경고했듯이 (이사야 6:9-10), “비유” (meshalim)가 결국에는 불순종하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언약백성들에게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를 가리우는 방편으로 쓰였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하나님 나라에 관해 더 알게 되는 은혜를 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복음서들 중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특히 누가복음은 그러한 예수님의 비유가 가득 담긴 보고라 하겠다. 그리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말씀을 풀어 도와 주는 교사들과 목자들을 예수님께서 선물로 계속 교회에 오늘날까지 허락하시고 계신다.
5)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에게 단지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 나라의 완성될 날을 기대하고, 간절히 사모하도록 우리의 영에 창조적 생동감을 불러 넣어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청중, 특히 제자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를 들자면, 비유의 모든 내용이 그들이 살던 사회의 문화와 생활양식과 자연환경과 관습과 공통된 사고방식들에 자연히 스며들고, 익숙한 소재들이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사는 제자들이 비유의 원래 의미를 이해하는 정도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성령하나님께서 이끄시고 조명해 주셔야만 우리가 비유에 드러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는 우리의 경험과 지적기능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비유의 본래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더 알기 위해 근 2000년의 시대차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상황과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예수님 당시의 모든 사회전반과 자연환경 및 문화 요소들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비유를 공부하기에 필요한 선행조건이라 하겠다. 따라서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면,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장래의 사건이기에 직접 경험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며, 창조적으로 그 뜻도 이해할 뿐만 아니라, 현재 어떻게 그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고 살 수 있을 지도 발견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된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21세기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명심할 점들을 요약해 보자:
(1)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반드시 비유를 쓰셨어야만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의도하신대로 전달하셨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2) 쓰여진 성경의 말씀은 그 말씀과 그에 따른 청중들이 살던 역사적인 배경이 반드시 있었다. 마찬가지로, 비유도 예수님의 선포하신 비유를 듣던 언약백성의 무리가 살던 역사적배경이 있었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 배경을 먼저 이해함으로써 비유를 사용하여 전달하는 예수님의 뜻을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할 것이다.
(3) 비유속의 모든 요소들을 똑같은 비중으로 대하면 예수님의 전달하신 뜻을 놓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예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셨던 뜻을 비유 속의 요소들과 소재들에서 추출하여 우리 스스로가 뜻을 변형시키거나, 더해 버리면서 마치 더 깊은 뜻이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방지하는 점도 중요하다. 그당시에 유대인들의 Rabbis들이 자주 사용했던 allegorical interpreting method (풍유적 해석법)이야말로 비유를 이해할 때에 조심해야 할 점이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복음 10:25-37) “나귀”는 무엇을 의미하며,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하며, “두 데나리온”은 무엇을 의미하고, “여관”을 무엇을 의미한다는 등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오류이다.
(4) 우리는 시간을 뛰어 넘어 예수님의 청중들 사이에 서서 그분의 비유를 들으며, 그후 해설을 따로 듣던 제자들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의도하신 뜻을 찾는 겸손하고도 부지런한 탐구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비유마다 그 비유의 전체를 흐르는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각각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생각할 점: 예수님의 비유들에서 우리는 제일 주요한 주제가 무엇이라고 이해하는가?